정신없던 미국 목회 시절 와중에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찾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복음과 성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 목사라,
‘스토리와 묘사가 괴기하다’라는 느낌을 가졌는데,
이렇게 한국을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당시 소설을 읽을 때는 우울했는데,
그 우울함이 이제 한국을 기쁨으로 떠들썩하게 한다.
아이러니… 우울함을 팔아 기쁨을 샀다!
그 와중에 요청이 있어 서평을 하나 썼다.
나야 역시 성경 얘기밖에는 없다. ^^
많은 생각으로 즐겁게 읽었고
어제 탈고하여 보낼 곳에 보냈다.
나에게는 ‘한강’ 보다는 ‘성경’이 더 실감난다. ㅎ
축자영감을 철저하게 믿는 분들에게는
많이 당황스러울 수 있는 책이다.
한강은 위대하다.
하지만 나는 옛날 냄새 나던 청계천이다.
내 이름을 ‘청계천’으로 바꾸고
성경에 대한 책 한 권 서평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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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대한 책 한 권 서평 올립니다.
피터 엔스 지음, 노동래 옮김.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 새물결플러스, 2024.
유승원(주안대학원대학교 객원교수, 미국장로교 은퇴 목사)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 또는 “성경에 써 있네”
괜찮은 번역자를 통해 살가운 우리말로 몇 개월 전에 출판되었지만 사실은 10년 늦게 우회하여 우리 손에 들어와 새삼 반가운 책이다. 한글 번역판 책 제목이 저술의 취지를 제대로 품는다.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 성경 너머로 읽는다는 것은, 글과 책으로서의 성경에 갇히지 말고 그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또는 허락하신, 성경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성품과 뜻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실천해야 한다는 함의다.
우리의 이 책 번역본이 이제 나오기 십년 전인 2014년 처음 출판되어 선을 보일 때의 영문 제목은, 영미권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친근한 찬송가 가사 “The Bible Tells Me So”를 그대로 옮겨온 패러디였다. 우리 찬송가에서는 “성경에 써 있네”(새찬송가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의 후렴 마지막 소절)로 불리고 있지만 원래 영문 가사와 우리 한글 번역 가사의 뉘앙스 차이가 어쩌면 저자 피터 엔스의 고민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찬송가 가사는 은근히 우리에게, ‘틀림이 없는 성경에 써 있으니 그대로 믿으라’는 점을 강요한다. 그러나 피터 엔스가 “The Bible Tells Me So”(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이야기한다)라고 책 제목을 달 때의 의도는, ‘성경의 발생과 존재 양식이, 시대와 문화의 상황 필요에 따라 다양성을 부담하며, 더 크신 하나님의 뜻 인지와 표현의 한계를 달고 있으니, 이러한 성경 현실의 존재 양식 너머로 과대포장하여 무리하게 보호하려 하지 말라’는데 있었다. 책의 원제에 굳이 부제(副題)로 붙여 놓은 글귀가 바로 그의 집필 목적이다. “The Bible Tells Me So: Why Defending Scripture Has Made Us Unable to Read It.” 성경을 옹호하는데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니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한탄이다. 물론 피터 엔스는, 패러디로 내놓은 자신의 책 제목이 우리 한글 찬송가에서 뉘앙스 다르게 불리고 있음을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다.
‘성경 절대 무오설’ 때문에 아프다
사실 우리는, 엔스가 이 책을 출판한 2014년 한 해 앞서 2013년에 나온 토론서인 Five Views on Biblical Inerrancy (Zondervan, 2013)를 염두에 두고 본서를 읽어야 한다. 『성경 무오성 논쟁』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온(2016, 새물결플러스) 그 책에서 엔스는, 스펙트럼의 편차를 보이는 다른 세 복음주의자와 비교할 때 왼쪽 극단에 위치하여 ‘시카고 성경 무오성 선언’(Chicago Statement on Biblical Inerrancy, 1978년)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적나라한 토론은 모두에게 약간의 내상을 입히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그러고 나서 다음해에 출판된 엔스의 책 『성경 너머로 성경 읽기』에는 그때 겪었을 보이지 않는 상흔이 작지 않게 묻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자기 책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31-45) 복음주의 전통에서 성장하여 개인적 신비 체험도 있었으며 가장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유명 신학교에서 짧지 않은 세월 강의하다가 성경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유가 되어 그 학교의 정년 보장 교수직을 떠나야 했다. 그가 짊어져야 했을 마음의 부담이 마지막 장의 개인적 권면인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317)의 표현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다. 책 주장의 요약이면서도 후기와 같은 이 마지막 장의 단락 소제목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317). “성경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아니고, 중심이었던 적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중심이 아닐 것이다”(318). “성경은 무기가 아니다”(319). “흔들리고 있는 신앙은 성숙하고 있는 신앙이다”(320). “두려워하지 말라”(321). “가지를 뻗으라”(322).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이 책의 영문 제목을 되풀이한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한다”(328). The Bible Tells Me So!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인가?
엔스가 정직하게 들여다본 기독교 성경은, 성경 자신에게 ‘절대 무오류의 하나님 속성 같은 완벽함’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음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이셨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정통 기독론의 고백에서 100퍼센트 하나님이시며 100퍼센트 인간이셨던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지만, 인간의 문화, 시대, 인간이기 때문에 갖는 약점과 한계를 모두 적나라하게 부담한다. 인간의 방식으로 주어진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만 붙일 수 있는 ‘절대 무오류의 완벽성’이라는 옷을 성경에 억지로 짜 맞춰 강제로 입혀 철벽 방어를 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폐습의 이데올로기라는 고민의 주장이다.
이 책에서 적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저자 엔스는, 사실 오늘날 전투적 복음주의 선언의 제 1 조건처럼 되어 있는 ‘성경 절대 무오설’의 강요와 다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구원의 확신을 갖는 일을, 성경에 어떤 사실적, 역사적, 과학적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성경 무오설’에 대한 확신과 동일시하는 이데올로기적 현상에 대한 저항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원본 성경 텍스트에 일체의 오류가 없다고 믿어야 하며, 후자에 대해 지적 확신의 보류가 있다면 그 사람의 전자(前者) 고백에도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교리적 전제를, 있는 그대로의 성경 내적 현상을 정직하게 관찰, 분석, 설명, 해석함으로써 그 허구를 지적하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엔스가 전공한 구약성경은 사람들을 너무 잔인하게 죽인다
독자를 당황에 몰아넣는 도발적 자극으로 깜짝 놀라 생각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위해 엔스는 우리들에게 고민스러운 정곡을 무자비하게 푹 찔러 문제의 책 현관을 연다. 현대적 인간 양심에 비추어 볼 때, 더구나 원수도 사랑하라 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도덕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바, 유아 포함의 잔혹한 인간 대학살을 명령하는 것으로 묘사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때의 하나님의 명령을 서슴없이 기록하고 있는 성경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25). 어떻게 해야 될까? 아니 이 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고 믿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당연히 혼란에 빠질 독자들에게 엔스는 비슷한 의문을 품게 만드는 성경의 여러 기록들을 구약성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전개 화법과 예화들을 동원해, 마치 관광 가이드처럼 구석구석을 헤집어 다니며 자신이 보여주려는 성경의 실상으로 안내해 간다. 성경 내의 기록들이 획일적 메시지로 통일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성경은 특정 관점을 주창하는 철학서나 조직신학처럼 상호 모순이 없이 일관성을 유지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인위적 의도 작업 없이 각기 다른 시대와 공동체의 필요에 부합하는 메시지들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다양성을 확실히 반영한다. 그래서 같은 시대의 왕정 역사를 기술하기 위해 포로 귀환 이후의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에 더 경도되어 있으면서 유다 중심으로 재구성된 내러티브로 ‘사무엘/열왕기’와의 차별성을 분명히 한 역대기가, 굳이 많은 내용이 중복됨에도 불구하고 성경 안에 그대로 병치되어 있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게 만든다(136-147). 물론 같은 현상이 신약성경에서는 소위 ‘공관복음’이라는 범주로 묶이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있음도 설명해준다(120-135). 여기에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요한복음까지 가세하면 의아함은 더 깊어진다. 적지 않은 내용이 중첩되고, 오늘날 서적 출판의 기준으로 당시 들어가는 지면 가성비를 보자면 경제적 낭비와 부주의처럼 보일 수 있을 정도로 같은 문구가 재차 반복된다. 그러면서 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기록의 내용이 다른 것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아주 명약관화하다. 그런데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런 비효율적이고 자체 모순이 되는 책들을 그 안에 그 모양 있는 그대로 담아서 품은 것이 성경이라는 말이다. 조금은 자유로운 소위 고등비평을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면 다 알고 있을 만한 양식 비평, 편집 비평, 역사 비평의 내용들인데 독자가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게끔 미국식 ‘아재 개그’를 자주 동원하여 나름 재미있게 서술한다. 성경 전체를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하나의 책으로 본다면 정말 치밀하지 못한 비일관성과 모순의 편재 때문에 허술하기 짝이 없어 당황스럽다.
성경을 과잉보호 하느라고 하나님을 버리지 말라
이렇게 허술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상을 내재한 성경에 대해 절대 무오성을 수용하도록 무조건 강요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 하나님을 불완전하며 허술하고 모순 가득하여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신으로 평가절하시키고 만다는 것이 엔스의 심각한 안타까움이다. ‘하나님이 완벽하시니까 성경도 완벽함에 틀림이 없다’는 논리적 비약의 전제가 ‘성경 절대 무오설’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성경 무오성에 대한 시카고 선언’(1978년)은 다음과 같은 표현에 200명 기독교 지도자들의 서명을 요구했다. “성경 무오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증거를 무시하는 것이요,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특징짓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선언의 서문에서 발췌). 하나님을 믿는다면 성경을 믿어야 하고 성경 무오함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는 강변이다. 정교한 분석과 설명이 필요한 개념인 ‘성경의 영감’ 개념을 지나치게 극단화 하여 성경을 무의식적으로 ‘신격화’ 하는 귀결이다. 그래서 성경의 완전성을 무리하게 방어하려다 참 하나님의 위상과 권위를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시키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 엔스의 깊은 걱정이다. 성경을 지키려고 하나님 얼굴에 심각하게 먹칠을 했다는 말이다. 성경을 보호하려고 하나님을 버렸다는 안타까움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성경을 이 모양 이대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깊은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를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완벽하지 않은’ 성경을 우리에게 이렇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어, 성경이 지금 있는 그대로 연약한 모습으로 자신의 말을 하게끔 겸손하게 수용함으로써 참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7장의 제목 “있는 그대로의 성경”을 그 한계의 역학 속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읽고 해석하는 지혜가 참 하나님을 바로 신앙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복음적 신실함이라는 믿음이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엔스는 신앙인이다
엔스가 신앙 없는 고대 문헌학자로 관념의 유희나 하고 말 사람으로 짐작하면 가벼움의 오해다. 엔스는 현금의 복음주의의 성경관을 치열하게 비판하지만 자신을 결코 복음주의라는 범주 바깥에 위치시키는 단언을 어디서도 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철저하게 믿고 고백하는 신자로서의 학자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첨언하는 부록처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 주장의 결론인 마지막 정리를, 찐한 글씨체의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로 장식한다(317).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않고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도 않는 신실한 복음의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엔스에게 있어 성경은 하나님 말씀인 것이 분명하다. 단지 그 표현 방식과 기술(記述)의 표피가 현대의 시각으로 볼 때 황당하기도 하고 용납하기 힘들 때가 적지 않으니, 우리가 성경의 그 모순적 다양성의 만화경을 너무 ‘현대적 합리성’에 맞추어 옹호하려고 무리하게 애써 싸우지 말고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해석해야 된다는 역설이다. 그렇게 성경을 성경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참 하나님을 신앙하자는 웅변이다.
현금의 기독교 세계에서 엔스 같은 입장을 품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솔직하다가 자기가 속해 있는 복음적 공동체에서 내침을 당해야 했다. 엔스를 읽는 우리도 비슷한 불안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우리에게 엔스는, 두려워 말며 불안해하지 말 것을 계속 권한다. 고민이 많으나 그 고민을 현실로 수용하면서 평안하기 원하는 자족(自足) 추구의 나름 행복한 그리스도인 학자의 음성으로 들린다. 쉽지 않은 애매함이다. 합리적 일관성의 부담과 교회 수호의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갖는 우려를 감안하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 믿어 성경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성경으로 한 평생 살려 한 사람이 재미있게 엔스의 책을 읽다 보니, 한편 성경이 너무 처참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도 살짝 스쳐 지나간다. 순간 하나님 말씀이 많이 불쌍해 보인다. 그 안에서 살짝 살짝 진짜 얼굴을 내미시는 하나님이 많이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손자들의 응석과 허황됨을 그냥 빙긋이 웃으면서 가끔 맞는 말을 어린 손주의 언어로 던져 주시는 허연 수염의 인자하신 할아버지…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엔스의 설명과 묘사는 과연 전적으로 옳은 것일까?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재미있다. 그러나 가볍지 않다. 수필 같이 자유롭다. 그러나 학술적이다. 도발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적이다. 읽어보고 고민하며 약간은 불편하면서 더 성숙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