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익은 알곡을 다 걸러내면 먹을 것이 남지 않고, 미운 사람을 다 걸러내면 쓸 사람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욕(辱)을 많이 하다 보면 욕(辱)에 둔감해지고, 매를 많이 휘두르다 보면 상대방(相對方)의 아픔에 둔감해지기 마련입니다.
소중(所重)한 나의 것이 남에겐 하찮을 수도 있고, 소중한 남의 것이 나에겐 하찮을 수도 있습니다.
남 비판(批判)하는 자가 저 비판받는 줄은 모르고, 남 비난(非難)하는 자가 저 비난받는 줄은 모릅니다.
타인(他人)을 잴 때는 성인군자(聖人君子)의 도덕적 잣대를 쓰고, 자신(自身)을 잴 때는 흉악범의 잣대를 쓰면서 비난(非難)과 비판(批判)을 합리화(合理化)하고는 합니다.
매사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처세(處世)하며, 사는 것이 삶의 중용지도(中庸之道)입니다.
그래서 선조(先祖)들이 ‘과유불급(過猶不及)’을 그렇게 강조하셨나 봅니다.
‘중용(中庸)’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황희(黃喜) 정승(政丞)입니다.
안방에 들어가면 아내 말이 맞는다고 하고, 마당에 가면 머슴 말이 맞는다고 하고, 부엌에 가면 계집종의 말이 맞는다고 하고, 사랑에선 아들 말이 바르다고 하면서, 누구하고도 적(敵)을 만들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중용(中庸)’은 쓰는 사람에 따라, 상황(狀況)에 따라 삶의 지혜(知慧)가 될 수도 있고, 줏대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용’이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삶의 중용지도’를 지혜롭게 잘 활용(活用)하면 처세(處世)의 달인(達人)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용’을 잘 지키며 사는 일은 평생(平生)의 삶의 숙제(宿題)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있다고 다 보여주지 말고, 안다고 다 말하지 말고, 가졌다고 다 자랑하지 말고, 들었다고 다 믿지 말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 서로서로 사랑합시다.
이 만날 친구(親舊)들이 있다는 것만 해도 축복(祝福)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