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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정부에서는 박정희를 지우려고 암살자란 영화까지 만들었지만 오히려 역풍을 맞고 있습니다 외국인으로 그가 목격한 일들을 증언하고 있으니 좀 길더라도 끝까지 읽으시면 민족주의자 박정희와 한국의 발전상을 확실히 알게 되리라 사료됩니다
그가 처음 한국 땅을밟은것은1965년봄이었습니다. 한일 국교정상화협정 이 체결되던 바로그해였습니다.
서울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가 받은 인상은 지금도 지워지지않는다고 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길거리에는 흙먼지가날렸고 아스팔트도로보다비포장흙길이 훨씬많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12년이지났음에도도심곳곳에 허물어진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1인당국민소득은 80달러남짓, 아프리카 가나보다도 낮은수준이었습니다. 일본 외무성 동료들 사이에서 한국은 이렇게 불렸습니다. “아무리도와줘도 스스로 일어서지 못할 나라.” 다나카 자신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랬습니다. 그런데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뒤 보게 된 풍경은 전혀 다른 나라 였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전국을 잇고 있었고포항에는 세계가인정하는 거대한 철강 공장이 연기를 내뿜고있었습니다. 울산 바닷가에서는 세계 최대급 유조선이바다로 미끄러져 나갔고 서울 도심에는 고층 빌딩이들어서고 있었습니다. 1965년에 그 흙먼지 날리던 나라가 맞는지 자신의 눈을 의심할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2026년, 그 나라의 반도체 기업들이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부품을 전 세계에공급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 한 기업이 전 세계 인공지능서버에 들어가는 고대역폭 메모리의 절반 이상을만들어냅니다. NVIDIA의 그래픽 처리 장치 안에 들어가는메모리도한국산입니다. OpenAI의 ChatGPT가 대답을 내놓을 때마다 그 연산의 핵심을 한국이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나카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기적의 씨앗이 어디서뿌려졌는지를. 그것은 경부고속도로만도 아니었고, 한국사람들조차 잘 모르는 훨씬 더 은밀하고 훨씬더결정적이었던 선택들이 있었습니다.
다나카는 만년필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써 내려갔습니다.
“나는 한국에 대해 틀렸다. 일본도 틀렸다. 미국도 틀렸다. 세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을 그들은 해냈다. 이 기록은 내가 직접 목격했던 그 비밀을 세상에 남기는 고백이다.”
빗소리가 조용히 서재를 가득채웠습니다.
🔹️1965년 6월 22일, 도쿄 일본총리관저의 한 회의실에서 조인식이 열렸습니다. 한일 기본 조약 그리고 대일 청구권 협정. 식민지배 36년에 대한 한국의공식적인 청산이이루어지는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의분위기는 묘하게엇갈렸습니다. 일본 측 외교관들은 속으로안도하고 있었습니다.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총 5억 달러의 자금으로 36년의 빚을 정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받아서 뭐라 하겠어요. 먹고 사는 데 쓰다가 다 없어지겠지.”
신참 외교관 다나카 겐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조인식 뒤풀이자리에서 선배 외교관이 건넨 말을 아직도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이걸로 한국 문제는 한 세대는조용해질 거야. 저 돈 다 쓰고 나면 또 와서손내밀겠지.”
다나카는 그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국 국내 사정은 더 복잡했습니다. 서울 거리에는 협정에반대하는 학생 시위대가 쏟아져나왔습니다.
‘굴욕 외교’라는 구호가 거리를 가득채웠습니다. 독립운동의 피 값이 고작 5억 달러냐는 분노였습니다. 야당은 협정 무효를 외쳤고 지식인들은 민족의자존심을 팔았다고박정희를맹비난했습니다.
박정희는 그 모든 비판을 침묵으로 견뎠습니다. 그리고 협정이 체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조용히 한 가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청와대 경제참모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결정이었습니다. 세계은행도, 미국 국무부도, 심지어 협정을 체결한 일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선택이었습니다. 제철소를짓겠다는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변변한 철강 공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술도 없었고 인력도 없었고 경험도없었습니다. 세계은행은 한국의 제철소 건립 타당성 조사를의뢰받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국은 철강 산업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투자대비성과를 기대하기어렵다.”
세계은행은 차관 제공을 거부했습니다. 일본 철강 업계의 반응은 더노골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제철 업계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이제철소를 짓겠다고? 우리도 수십 년 걸린 일인데 지어 봤자 고철 덩어리 될 거야.”
그게 일본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었습니다. 다나카도 당시 외무성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고 회고했습니다.
“청구권 자금의 제철소 투자 계획은현실성이 희박하며 한국 정부의 무리한 욕심으로 판단된다.”
그런데박정희는 멈추지않았습니다. 그는 청구권 자금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 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이미 마음속에 정해두고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참모들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이 돈을 먹는 데 쓰면 한 번 먹고 끝이다. 그러나 공장을 세우면 그 공장이 영원히 돈을 만들어 낸다.”
철강은 모든 산업의쌀이었습니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고, 배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고,건물을 세우려면 철이필요합니다. 박정희는 알고있었습니다. 한국이 진짜 산업 국가가 되려면 제일 먼저 철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없으면 나머지 모든 것이 모래 위의 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포항을 선택했습니다. 바다와 인접한 입지, 원료 수입과 제품 수출에 유리한 항구 조건. 박정희는 이미 지형을 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공장 하나를짓겠다는 게아니었습니다. 한국산업화의 심장부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다나카는 회고록에이렇게 썼습니다.
“그때 우리는 박정희가 단순히 돈을 쓰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돈이 아니라 나라의 구조를 설계하고있었다. 우리가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늦은뒤였다.”
5억 달러 중 상당 부분이 포항 한 곳에 집중됐습니다. 주변에서는 무모하다고 했고전문가들은 실패를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결단이옳았는지그렇지않았는지는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에 온 세상이 확인하게됩니다.
🔹️1970년 4월 1일 경상북도 포항 영일만 바닷가,갈대밭과모래사장밖에 없던 황량한 해변에서포항제철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이 직접참석했습니다. 단상에 선 그의 표정은 굳어있었습니다. 축제 분위기라기보다는 전쟁터에 나서는 장수의 얼굴에가까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었습니다. 세계은행은 이미 차관을 거부했고 당초 협력하기로 했던 서방 철강 기업들은 하나둘 손을 떼고있었습니다. 자금도 빠듯했고 기술도 없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수근댔습니다. “저 나라 망한다.”
바로 그 시점에 박정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카드를꺼냈습니다. 일본으로 사람을보냈습니다. 공식 외교 채널이아니었습니다. 조용하고 은밀한방식이었습니다. 박정희의지시를 받은 박태준은 일본 제철 업계의 퇴직 기술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이미 현장 경험을 쌓은 숙련 기술자들, 정년퇴직을 앞두었거나 이미 퇴직한 엔지니어들이 대상이었습니다. 제안은 단순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제철소를 함께 지어달라.”
처음에는 거절이많았습니다. 아직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시절이었고 한국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박태준은 포기하지않았습니다. 설득하고 조건을 높이고 다시 찾아갔습니다. 결국 수십 명의 일본인 기술자들이 포항행을 결심했습니다.
다나카 겐지는 이 사실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당시 그는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에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상부로부터이상한보고를 접했습니다. 일본인기술자들이 포항 공사 현장에 다수 투입되어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직접 현장을 확인하러포항으로내려갔습니다. 그가 목격한 장면은충격이었습니다. 공사 현장 곳곳에서 일본인엔지니어들이 언어가 달랐지만 손짓발짓으로, 때로는 쪼그려 앉아 흙바닥에 그림을그려가며 기술을전수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인기술자들은 메모지가 부족하면 손바닥에까지 받아적었습니다.
다나카는 그 장면을 보고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회고했습니다. 경쟁심도아니었고 적대감도 아니었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감정이었습니다. 일본이 수십 년에 걸쳐 싸워온(쌓아온) 기술이 바로 코앞에서 다른 나라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일본인들의 손으로 직접. 그러나 그것이 박정희의 계산이었습니다. 단순히 설계도를 가져오는것으로는부족했습니다. 철강 기술은 도면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물을 다뤄본 사람의 몸 안에 있는것이었습니다. 수천 도의 열기 앞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설비가삐걱거릴 때 어디를 먼저 봐야 하는지, 그것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아니었습니다. 박정희는 그것을알았습니다. ‘기술은 사람 안에 있다. 그러니 사람을 데려와야 한다.’
포항제철현장에서 한국인 기술자들은 단순히 일을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인 기술자 한 명이 한국인 기술자 서너 명을밀착지도하는 방식으로 운영됐습니다. 일본인이 떠나고 나면 그 기술이 한국인 몸속에 완전히 남아 있도록 하는구조였습니다. 박태준은 이것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기술을 수입한 것이 아니라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결과는 세상을 놀라게했습니다. 1973년 포항제철 1기 설비가완공됐을 때 전 세계 철강 전문가들이 경악했습니다. 세계은행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제철소가 예정보다빠르게, 높은 품질로 완공되자 철강 업계관계자들이 직접 현장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말을 잃었다고합니다. 다나카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인들이 기술을 흉내 낼 것이라고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기술을소화했다. 흉내와 소화는 전혀 다른 것이다. 흉내는 따라 하는 것이고 소화는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포항에서 나는 그차이를처음으로 목격했다.”
그리고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박정희가 포항제철에서 실험한 이 방식, 즉 외국의 기술자를 불러 현장에서 함께 일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인기술자가 기술을온몸으로 흡수하게 하는 방식은 이후 조선, 자동차, 전자 산업으로 그대로이식됩니다. 그리고 훗날 반도체산업에서도 같은 방식이 반복됩니다. 오늘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정상에 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천재가 나타나서 이룬 일이아니었습니다. 포항 영일만 해변에서 한국인기술자가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던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다나카는 펜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다음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아직 써야 할 이야기가 훨씬 더남아있었습니다.
🔹️1973년 1월 서울,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화 선언을발표했습니다. 철강에 이어 조선, 자동차, 기계, 전자, 화학까지 한국이 이 모든 산업을 스스로 일으키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발표가 나오자마자 서울 주재 외국 외교관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습니다. 다나카도 그 자리에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기억했습니다. 다들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아직 포항제철도 완공되지 않은 나라가 무슨 중화학공업이냐는반응이었습니다.
워싱턴의 반응은 더 직접적이었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즉각 우려를표명했습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에 집중 투자할 경우 재정 불균형과 인플레이션이 심해져 경제 전체를불안정하게만들수있다는 경고였습니다. 세계은행도 같은 목소리를 냈습니다. “한국의 비교 우위는 저임금 경공업에 있다. 중화학공업은 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다.”
일본의 속내는 더복잡했습니다. 다나카는 당시 외무성 내부에서 오간 전문 내용을 회고록에서 조심스럽게 언급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무리한 산업화 계획에 우려를표했지만, 실제로는 전혀다른이유가 있었습니다. 한국이중화학공업에성공한다면 일본의 핵심 수출 산업과 직접 경쟁하게 된다는위기감이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최대 수출 산업 중 하나였고 철강과자동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이 잘 되면 일본에 위협이 된다.’ 외교적으로 말할 수 없었던 속내가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박정희는 이 모든 압박을 정면으로 무시했습니다. 그에게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경공업으로는 절대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발과 가발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 봤자 그것은 영원히 하청일 뿐, 스스로 공장을 짓는 나라가 되어야했습니다. 박정희가 당시 경제 참모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가 부자 나라의 충고를 듣고 부자가 된 예는 역사에 없다.”
그것은 단순한 고집이아니었습니다. 이미 포항제철에서 검증된자신감이었습니다. 세계은행이 불가능하다고 했던포항제철이 완공됐습니다. 일본이비웃었던 한국기술자들이 쇳물을뽑아냈습니다. 박정희는 그 경험에서 하나의 확신을 얻었습니다. ‘전문가들의 반대는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뚫고 나가야 할 장벽이다.’
중화학공업화는 속도전이었습니다. 울산에는 현대조선소가 들어섰습니다. 허허벌판이었던 울산 미포만이 세계최대조선소 부지로변해갔습니다. 거제에도 조선소가 건설됐습니다. 창원에는기계공업 단지가 조성됐고 여수에는석유화학 단지가 세워졌습니다.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공사판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이 시기를취재하기 위해 남부 공업지대를 직접순회했습니다.
포항은 일본의 도움이라도 받았습니다. 그런데현대조선소는달랐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배 한 척 만들어 본 적 없는 상태에서 영국의배주문을 먼저 따내고 조선소 건설을 나중에시작했습니다. 주문을 받아놓고 공장을 지은 것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이 사실을 알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경영학 교과서에 나오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는, 오직 무서운 배짱과속도로만 가능한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짱 뒤에는 박정희의지원이 있었습니다. 정부가 금융을 밀어줬고 인력 양성을지원했으며 외교적으로 수출 시장을 개척해줬습니다. 국가가 기업의 등을 밀고 기업이 세계 시장으로 뛰어드는 구조. 다나카는 그것을 보면서 처음으로두려움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산업화가아니다. 이들은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반대했던 중화학공업 선언 후 1980년대 한국은 세계 5위권의 조선 강국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조선업계는 한국의 물량 공세에 밀려 시장을 내주기 시작했습니다. 워싱턴의 경제학자들은 한국 사례를 설명할 새로운 이론을 찾아야 했습니다.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은 한국이아니었습니다. 조언을 건넸던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1977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제23회국제기능올림픽이 열렸습니다. 기능올림픽은 전 세계 청년 기능인들이 용접, 선반, 전자, 배관, 자동차 정비 등 수십개직종에서 기술을 겨루는 대회입니다. 올림픽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당시 국제사회에서 그다지주목받는 행사는아니었습니다. 선진국들도 형식적으로 참가하는수준이었고 언론의 관심도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상식이 끝나고 난 뒤 대회 관계자들 사이에서이상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이 또 1위를 했다.”
‘또’라는 표현이 핵심이었습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이미 우승을 수년째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압도적인 점수 차로.선진공업국들인 독일, 일본, 스위스를 제치고 한국 청년들이금메달을 쓸어담고 있었습니다.
다나카 겐지는 해마다 일본 대표단의참관인 자격으로 위트레흐트에 와 있었습니다. 시상대에태극기가 올라가는 장면을 보면서 그는 처음에는 단순한 의문을 품었습니다. ‘한국이 왜 이 대회에서 이렇게 강한 것인가?’ 그런데 귀국 후 조사를 해보니 단순한 의문이충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국제기능올림픽을국가전략으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대회가 열리기 수년 전부터 전국의직업훈련원과공업고등학교에서 선수를 발굴하고 합숙 훈련을 시키고 국비로지원하는 시스템이 이미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금메달리스트에게는병역혜택이 주어졌고 귀국 후에는 대기업 특채가보장됐습니다. 기술자가 영웅 대접을 받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 박정희의 구상이었습니다. 당시대한민국은 기능올림픽을 진짜올림픽처럼 대했습니다. 금메달리스트가 귀국하면 카퍼레이드가 열렸습니다. 청와대에초청되어 대통령과 악수를나눴습니다. 신문 1면에 얼굴이실렸습니다. 대학 진학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던시대에 박정희는 ‘손으로 일하는 사람이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메시지를 온 나라에 던진 것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이 구조를파악하고 나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대회준비가 아니었습니다. 박정희는 기능올림픽을 통해 두 가지를 동시에달성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실제 산업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최적의 기술 인력을전국적으로 발굴하고 훈련시키는 것, 또 하나는 기술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기술자는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공부 못 하면 공장 간다”는 말이공공연하게 쓰이던시절이었습니다. 박정희는그인식을 뒤집으려 했습니다.
‘국가가기술자를 영웅으로만들면 젊은이들이 기술을선택한다. 젊은이들이 기술을선택하면 공장이돌아간다. 공장이 돌아가면나라가 산다.’
그것은 단순한 포상 정책이 아니었습니다. 인력을설계하는 국가전략이었습니다.
다나카는 귀국 후외무성보고서에 이런 내용을 담았습니다.
“한국의기능올림픽 전략은 단순한 대회 성적 관리가 아니다. 이것은 산업 인력 양성 시스템의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은 지금 미래의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 미래의 기술 엘리트를 키우고 있다.”
그 보고서는 외무성 서랍 속에서잠들었습니다.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다나카는 알았습니다. 기능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건 스무 살 한국 청년들이 10년 뒤, 20년 뒤에 어떤 자리에 서 있을지를.그들이 포항제철의 현장 공장장이 되고,현대조선소의기술책임자가 되고, 그리고언젠가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공정엔지니어가 될 것이라는 것을.기능올림픽 금메달이 반도체공장으로 이어지는 그 길을 박정희는 1970년대에 이미 닦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정상에 선 배경에는 수십 년에 걸쳐 손기술을연마한 수만 명의 현장 기술자들이 있습니다.
그 기술자들이 어떻게만들어졌는지를이해하지 못하면 한국의 기적은 영원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나카는 그것을위트레흐트시상대앞에서 처음으로어렴풋이감지했습니다. 태극기가 올라가는시상대를 바라보며 그는 조용히 수첩을 꺼내 한 문장을적었습니다.
“한국은 지금 사람을 만들고 있다.”
🔹️1971년 봄 서울, 박정희 대통령은조용히 하나의 결정을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포항제철 기공식이 열린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제철소 건설에 매달려 있던 그때, 박정희는 전혀 다른 곳을 보고있었습니다. 쇳물을뽑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있었습니다. 쇳물을 설계하는 사람, 공장을설계하는 사람,산업자체를 설계하는 사람이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한국과학원, 훗날 카이스 트(KAIST)로 불리게 될 기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겉으로보기에는 그저 대학원 하나를 세운 것처럼보였지만 들여다보면 전혀달랐습니다.
카이스트는 처음부터 일반 대학과 다른 원칙 위에 세워졌습니다. 등록금 전액 면제, 생활비 지원, 병역 혜택, 미국 수준의 연구 환경. 당시 한국 어디에도 없던조건이었습니다. 박정희의 목표는단하나였습니다. ‘미국에 나가있는한국인 과학자들을 데려오는 것.’ 당시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스탠퍼드대학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 등에는 수백 명의 한국인 이공계박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한국에는변변한 연구 장비도 없었고연구비도 없었으며 안정된 지위도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그 조건을 통째로 바꿨습니다. 직접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미국 현지에서 한국인과학자들을개별면담했습니다. 설득이 쉽지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반신반의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내건 조건이 너무 좋아서 오히려 믿기 어려웠던것입니다. 실제로 귀국한 과학자 중 일부는 약속이지켜지지 않을것을고려해 미국 영주권을 유지한 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박정희는 약속을지켰습니다. 카이스트 초대교수진에는 미국 유수 대학에서 연구하던한국인 박사들이 대거 포함됐습니다. 연구실에는 당시 한국 일반 대학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최신 장비가들어왔습니다. 정부가 직접 연구비를 지원했습니다. 학생들은 전원 장학금을받으며 오직 연구에만 집중할수있었습니다.
다나카 겐지는 카이스트 설립 소식을 외무성 보고서를 통해 뒤늦게접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개발도상국들이 흔히 하는 이공계 대학 설립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카이스트 출신 연구자들이 실제 산업 현장에투입되기 시작하면서 다나카의시각이 달라졌습니다. 포항제철의 공정 개선에 카이스트 출신 연구자가 투입됐습니다. 현대자동차의 엔진개발팀에도 같은 흐름이 이어졌습니다. 단순히 외국 기술을 따라 하는것이아니라 스스로개선하고 독자 기술을 개발하기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다나카는 회고록에이렇게 썼습니다.
“포항제철이 한국의 손을 만들었다면 카이스트는 한국의 머리를 만들었다. 손과 머리가결합되는 순간 한국은 더 이상 따라가는 나라가아니었다.”
그 말은 단순한 수사가아니었습니다. 카이스트 졸업생들은 이후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현대자동차 기술연구원, 포항공과대학교 등으로퍼져나갔습니다. 그들이 쌓은 연구가 한국 산업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씩끌어올렸습니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3나노 공정 반도체를양산하고SK하이닉스가 전 세계 인공지능서버에 들어가는고대역폭 메모리를 독점 공급하는 배경에는 이 인재들의계보가 있습니다. 그 계보의 뿌리가 1971년 봄 박정희의결단이었습니다.
다나카는 회고록을쓰면서 한 가지 사실에 새삼 놀랐다고 했습니다. 박정희가 카이스트를 세운 것은 포항제철기공식 이듬해였습니다. 중화학공업 선언보다도 2년이나 앞선 시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박정희는공장을 짓기 전에 공장을 움직일 인재부터 만들고있었습니다. 보통의 지도자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짓습니다. 도로를 깔고 공장을 세우고 건물을올립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먼저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머릿속에들어가는 지식과 기술, 그것이 수십 년 뒤에 가장 강력한 국가 자산이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나카는 펜을 내려놓고 잠시 눈을감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주재하던 시절 박정희를 독재자로만 봤습니다. 철권통치, 유신헌법, 언론 탄압,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람은 다른 눈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의 손을 키우고, 아무도믿어주지 않는 두뇌들을 불러 모으고, 아무도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조용히설계하고 있었습니다.
그 두 가지가 한 사람 안에 있었다는 것이 다나카에게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부분이었습니다.
🔹️1979년 가을 도쿄, 한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해있었습니다. 14년, 그가 한국에 머문 시간이었습니다. 서른도 안 된 청년외교관으로 첫발을 디뎠던 나라를 마흔 중반의 나이에 떠난것이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아시아 담당 과장으로근무하게 됐습니다. 업무 중 하나는 한국의 산업 동향을지속적으로 파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보고서를 검토하면할수록 다나카는 이상한 감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가 예상과 달랐습니다. 아니, 예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일본철강업계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포항제철이 단순히 일본산 철강을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품질과 가격 양쪽에서 일본 제품을압박하기 시작한것이었습니다. 조선업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대조선과 대우조선이 일본조선소들의 수주 물량을 빠르게 잠식해 가고있었습니다. 일본이 수십 년에걸쳐구축한 시장 지위가 불과 몇 년 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나카가 더 주목한 것은 따로있었습니다. 일본의 산업 구조를참고하되 한국의방식으로 재설계하고있다는느낌이보고서곳곳에서 감지 됐습니다. 일본은 산업을 키울 때 수십 년에걸쳐단계적으로올라갔습니다.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중공업에서 첨단 산업으로, 한 단계를 충분히 소화한 뒤에다음단계로 넘어가는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이상식이었고교과서였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단계를압축했습니다. 경공업과 중공업을 동시에밀어붙이면서 이미 전자 산업과 반도체 산업의 씨앗을 뿌리기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스트에서 키운 연구 인력이 반도체 분야에투입되기 시작했고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 진출을선언했습니다. 1970년대 말의일이었습니다.
다나카는 당시 작성한 내부 보고서 초안을 회고록에서 언급했습니다.
“한국은 현재 일본산업구조의 복사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일본이 올라온 계단을더빠르게, 그리고 더 넓게 오르려 하고 있다.
특정산업분야에서일본을추월하는 시점이 반드시 온다.”
그 보고서는 상부에올라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외무성 분위기에서 그런 내용은 지나친비관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설마한국이 …’라는 정서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초안을 서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30년이 넘도록 꺼내지지 않은 채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초안대로 흘러갔습니다. 1983년삼성전자가 64K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일본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던 시장에 한국이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일본 반도체 업계는 처음에 코웃음을쳤습니다. 그러나 그 코웃음은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은 믿기 어려운 속도로 일본을추격했고 결국추월했습니다. 다나카는 그 과정을도쿄에서 지켜봤습니다. 그가가장충격을 받은 것은 기술의 속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기술을만들어낸 사람들의 정체였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의 기술자들이 현장 공정을 이끌고있었습니다. 포항제철에서 쇳물을 다뤘던 경험이 반도체 공장의 정밀 공정 관리로 이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따로따로존재하는것이아니었습니다. 하나의 설계 아래 연결된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설계를 그린 사람이박정희였습니다.
다나카는그제야 이해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두려워한 이유가 단순히 한국이 잘 따라와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일본이 진짜 두려워한 것은 한국이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따라오는 나라가 아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앞서가기 시작한 나라, 그것이 일본이 가장 두려워한 한국의 진짜 모습이었습니다. 다나카는 서랍에서 꺼낸 30년 전 보고서 초안을 다시 펼쳐봤습니다. 빛바랜 종이 위의 문장들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현실이 예상보다 더 빠르게진행됐습니다. 그는 그 초안을회고록의 마지막부록으로 첨부하기로 했습니다.
30년 전에 상부에 올리지 못했던그문장들을 이제 세상에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2019년 가마쿠라, 비가 완전히그쳤습니다. 서재창문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비스듬히 들어왔습니다. 다나카 겐지는 책상 위에 펼쳐진 원고지 묶음을바라봤습니다. 몇 달에 걸쳐 써 내려온 회고록이었습니다. 빽빽하게 채워진 글자들, 그 안에는 그가 평생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이 담겨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장만남았습니다. 다나카는 만년필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오래 생각했습니다. 그는외교관이었고 평가는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76세의 나이에 이르러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본 것에 대한 솔직한 판단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쓰기시작했습니다.
🔹️”박정희는 독재자였다.
그 사실을 나는 부정하지않는다. 자유를 억압했고 반대자를 탄압했으며 헌법을 자신의 뜻대로바꾸었다. 그것은 역사가기록해야 할 과오이고 피해자들이 잊어서는 안 될 상처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도 사실이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던 나라를 믿었다. 세계가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그는 가능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이 반대했을 때 전문가들의 논리를넘어섰다.
철모를 다루는 기술자를영웅으로 만들었고 두뇌를 가진 과학자는조국으로불러들였으며 손과 머리가 함께 움직이는 나라를설계했다. 그 설계가 오늘의대한민국이다.”
다나카는 펜을 멈추고 잠시 눈을감았습니다. 창밖 멀리서 바람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마쿠라의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바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바람소리를 들으며 오래전 포항의영일만을 떠올렸습니다. 갈대밭과 모래사장뿐이던 황량한 해변, 그곳에서 기공식 단상에 서있던박정희의 굳은 표정, 그리고 몇 년 뒤 그 자리에 우뚝 솟아오른거대한 용광로의 붉은 빛. 그 장면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다나카는 다시펜을들었습니다. 그리고 회고록의 진짜 마지막 문장을 적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14년을 살았다. *처음에는그나라를 얕보았고, **나중에는두려워했으며, ***마지막에는 존경하게되었다.
한 나라가 한 세대 만에 이런 일을 해낸다는 것이가능하다는 것을나는한국을 통해 처음으로 배웠다.”
만년필이원고지 위를마지막으로 미끄러졌습니다. 다나카는 원고를덮었습니다.
그리고 책상 위의낡은봉투를 집어 서랍 안에 다시넣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회고록 안에 모두담겼습니다. 세상에 내놓을 준비가 됐습니다. 그는 창가로걸어갔습니다. 저녁 햇살 속에가마쿠라의 지붕들이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손녀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
🇰🇷한국이 왜 이렇게 잘 살게 됐어요?”
이제그는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하루아침에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포항 영일만 해변의 흙먼지 속에서시작됐습니다. 일본인 기술자의손짓을 손바닥에받아적던 한국인 기술자의 땀 속에서자랐습니다. 위트레흐트 시상대에서 태극기를 바라보던 스무 살 청년들의 눈빛 속에서 단단해졌습니다. 미국에서 영주권을 손에 쥔 채 조국으로 돌아온과학자들의 결단 속에서 꽃을피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세계인공지능 서버 안에서 한국이 만든 반도체가 쉼 없이 연산하고 있습니다.
박정희라는 이름 앞에는 반드시물음표가 따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역사의 공과는 하나의 자로 잴 수 없습니다. 그러나이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무도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을 때그는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그선택들이 50년 뒤에 결실을맺었습니다.
오늘이이야기를 들으신여러분께 한가지여쭤보고 싶습니다. 만약 그시절여러분이 그자리에있었다면, 세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셨겠습니까? 전문가들이 반대하고우방국이 만류하고 국내에서도 반발이 쏟아질 때 그 외로운 결단의 자리에 섰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오늘 ‘해외 감동사연’에서는 전직일본외교관 다나카 겐지의 시선을 빌려 아무도주목하지 않았던박정희의 네 가지 결정적 유산을살펴봤습니다.
🔹️대일 청구권 자금 5억달러를 소비가 아닌 포항제철이라는 산업의심장으로 만든 결단
🔹️기술을 수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기술자를 직접 불러들여 한국인의 몸에 이식한 방식
🔹️국제기능올 림픽을국가전략으로 운영하며 손으로 일하는 기술자를영웅으로 만든 인력 설계
🔹️공장을 짓기 전에카이스트를 먼저 세워 미국 유학파과학자들을 불러들인 50년짜리 두뇌 설계
이 결정들이 오늘날 전 세계 인공지능시대를 이끄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뿌리가됐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시작됩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의 발전을 직접 보고 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