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이름은 한자로 착할 선善, 공경할 경敬을 씁니다. 어릴 적부터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로서 착하게 살고 남편과 어른을 공경해라’는 뜻으로 여겼으니까요. 그렇게 사십여 년을 살다가 첫 책 출간을 앞두고 마침내 아버지에게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책을 내면 유선경 말고 필명을 따로 쓸 거예요.”
그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감추지 못한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난생처음 보는, 서운함을 넘어 진심으로 상처받은 표정이었습니다.
“내가 네 이름을 어떻게…… 얼마나…… (말을 잇지 못하고) 몇 날 며칠 옥편을 뒤적이며 공들여 지었는데…….”
마음이 약해졌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어 샐쭉하니 여쭸지요.
“무슨 뜻으로 지으신 건데요? (속생각: ‘뻔하지 뭐’)”
아!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지금도 부끄럽고 아픕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 공경받는 사람이 되라고 지었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당황했던지 도리어 성을 내고 말았습니다.
“진작 좀 말해 주지!”
이름 글자는 오해했을 때나 이해했을 때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알고 나서 ‘나 이렇게 축복받은 아이였어!’ 하는 뿌듯함이 생겼습니다. 고리타분한 이름이 아버지에게 받은 가장 큰 선물로 바뀌었습니다. 앎이 준 변화입니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하면 세상이 변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해야 세상을 대하는 당신이 변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세상은 그 후에야 변하겠지요.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시작은 ‘앎’에 달려 있습니다. ‘많이’가 아닌 ‘올바로’ 에 말입니다.
어휘력이나 문해력의 목적은 단순히 잘 읽고 잘 말하며 잘 쓰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읽고 말하며 쓰는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한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인생의 다양한 과제와 문제를 예측하고 대비하며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했음에도 피할 수 없는 위기나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맞아 쓰러지더라도 무기력이나 절망, 증오에 빠지는 대신 수월히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선경 저 —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