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음악 생성

노래는 오랫동안 몸을 통과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갈라진 성대, 담배에 절은 목, 스무 해쯤 기타 줄에 눌려 뭉툭해진 왼손 끝. 소리에는 그 소리를 내기까지 닳아버린 시간이 묻어 있었고, 사람들은 사실 그 닳음을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소리가 몸을 거치지 않고 도착한다. 폐를 가진 적 없고 이별을 겪은 적 없는 무엇이 이별의 노래를 완벽한 음정으로 부른다. 슬픔의 재료를 한 번도 만져본 적 없이 슬픔의 완성품만을 내놓는 공정.

새벽 두 시, 잠들지 못한 사람이 창을 열고 단어 몇 개를 적어 넣는다. 비 오는 날, 떠난 사람, 낮은 목소리. 사십 초 뒤에 노래가 하나 태어난다. 후렴이 정확히 예상한 자리에서 올라가고, 브리지에서 목소리가 알맞게 갈라진다. 그가 그 곡을 올린다. 며칠 뒤 댓글창에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 울었다는 문장이 쌓여 있다. 어머니를 가져본 적 없는 목소리가 부른 노래 앞에서, 어머니를 잃은 사람들이 진짜로 운 것이다.

가짜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게 되는 지점이 바로 거기다. 눈물은 위조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음악은 처음부터 빈 그릇이었고 슬픔은 늘 듣는 쪽에서 부어 넣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축음기가 처음 왔을 때도 사람들은 영혼 없는 소리라고 했고, 마이크가 왔을 때도, 오토튠이 왔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다만 이번에는 한 가지가 다르다. 그 노래에 고맙다고 말할 상대가 없다는 것. 감동은 남았는데 감동을 돌려줄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 우리는 여전히 위로받지만, 위로한 자가 없는 위로를 받는다.

가게마다 이름 없는 노래가 흐르고, 아이는 그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학교에 간다. 누가 만들었는지 묻지 않는 세대가 자라는 중이다. 어쩌면 음악은 원래 주인이 필요 없었던 것이고, 주인을 찾던 쪽이 유별났던 건지도. 그래도 어느 밤에는 낡은 카세트를 뒤져 음정이 어긋난 옛 노래를 굳이 꺼내 듣는 사람이 있다. 그 어긋난 자리에 누군가의 그날 저녁, 목이 잠긴 이유, 다시 부르지 못한 사정이 남아 있어서. 우리가 지키고 싶었던 것이 음악이었는지 사람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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