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질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에게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고후 12:7)가 있었다. 비유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가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임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손가락에 거스러미만 있어도 예민한 사람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져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바울이 사용한 단어 ‘스콜롭스’(σκόλοψ)는 ‘뾰족한 것’의 의미로 창이나 칼끝 같이 사물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쪼개진 사물의 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땅에 박혀 움직이지 않는 말뚝을 뜻할 때도 이 단어가 쓰였다. 내 여린 몸의 살 어딘가 끝이 뾰족한 대쪽이나 쇠창살 같은 것이 박혀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사탄의 사자’라는 표현을 들이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히브리어 ‘사탄’은 적이나 원수를 가리키는 말로 누군가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최악의 막말 표현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힘들고 미웠으면 ‘사탄의 사자’라고 재차 부연설명을 했을까 싶다.
이 지긋지긋한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워낙 의견이 분분해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객관적 단정의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주석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바울 자신이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아픔과 연계해서 능욕, 궁핍, 박해, 곤고 등을 그의 약점으로 언급하기 때문에(고후 12:10), 그리고 ‘사탄의 사자’라는 부언(附言) 때문에(고후 12:7)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며 사역과 삶을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을 ‘육체의 가시’로 보는 해석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경우 우리 식의 ‘눈의 가시’ 또는 ‘인생의 가시’나 ‘사역의 가시’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굳이 ‘육체의 가시’라고 해서 구체적으로 신체적 고통을 적시하는 것 같이 느끼게 만드는 은유의 어색함은 노련한 글쟁이 바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했다는 표현으로 묘사하는 것은 많이 불편한 수사법이다. 사용된 동사 ‘아피스테미’(ἀφίστημι)는 제거의 함의가 강한데 사람에 대해 이런 기도를 세 번씩이나 ‘간청’으로 드렸다는 것은(고후 12:8) 사랑과 복음의 사도로서는 입에 담기에 유치할 정도로 창피한 생경함의 노출이 될 것이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한 번 기도했다’고 말하면, 대체적으로 40일 정도의 집요한 작정 기도 같은 것이었다. 바울이 미운 사람들의 제거, 또는 그런 인간관계의 해결을 위해 세 번에 걸쳐 장기간 모든 것을 걸고 기도하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 주려 해도 그럴 수 없이 영적으로 흉측한 밉상이다.
그래서 나도 구체적 증언과 같은 확정 증거는 없으나, 바울의 ‘육체 가시’가 강렬한 환상 체험(고후 12:1-7) 후에 인간의 뇌에 부작용처럼 남을 수 있는 상흔 같은 ‘간질’(癎疾, epilepsy)이었을 것으로 감히 추정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했던 자신의 질병 암시 표현 때문이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갈 4:13-14).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 ‘간질’ 현상은 수치스러움을 넘어 사역에 심각한 치명적 장애였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귀신 들린 것으로 보면서 조롱했을 것이다. 바울이 이 육체의 가시를 자신의 ‘약함’ 또는 ‘수치와 능욕’ 등으로 암시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후 12:10).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치명적 논란이 될 수 있는 약점을 바울 몸에 그대로 두셨다. 복음은 바울의 능력과 체면이 아니라 그 약점 가운데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고후 12:9). 바울이 이 고질병을 위해 그렇게 간절히 장기간 기도했으나 최종적으로 거절 당하면서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주신 결론의 말씀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12:9a). 그래서 세 번씩이나 기도했으나 해결 받지 못한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오히려 크게 기뻐하면서 자랑거리로 삼는 역설의 진리를 선언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2:9b).
그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한 평생 짊어지고 사는 치명적 아픔이었던 점은 ‘사탄의 사자’라는 말에 살 깊이 박힌 총알처럼 남아있다. 누구에게나 이런 사탄의 사자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에게, 그 고통을 제거할 수는 없으나 그 고통을 감내하여 승화시킬 수 있는 은혜가 반드시 넘친다. 그래서 내게 ‘사탄의 사자’라고 악담할 만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절감될 때 하나님 나라 인생의 복은 오히려 절정에 이른다. 내 생애 돌아보니, 나도 바울같이 그랬다. 사탄의 사자라고 할만한 것들이 운명처럼 인생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재미있는 성경상식 88
“간질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바울에게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고후 12:7)가 있었다. 비유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가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임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손가락에 거스러미만 있어도 예민한 사람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져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바울이 사용한 단어 ‘스콜롭스’(σκόλοψ)는 ‘뾰족한 것’의 의미로 창이나 칼끝 같이 사물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쪼개진 사물의 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땅에 박혀 움직이지 않는 말뚝을 뜻할 때도 이 단어가 쓰였다. 내 여린 몸의 살 어딘가 끝이 뾰족한 대쪽이나 쇠창살 같은 것이 박혀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사탄의 사자’라는 표현을 들이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히브리어 ‘사탄’은 적이나 원수를 가리키는 말로 누군가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최악의 막말 표현이다. 그 고통이 얼마나 힘들고 미웠으면 ‘사탄의 사자’라고 재차 부연설명을 했을까 싶다.
이 지긋지긋한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워낙 의견이 분분해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객관적 단정의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주석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바울 자신이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아픔과 연계해서 능욕, 궁핍, 박해, 곤고 등을 그의 약점으로 언급하기 때문에(고후 12:10), 그리고 ‘사탄의 사자’라는 부언(附言) 때문에(고후 12:7) 그를 집요하게 괴롭히며 사역과 삶을 힘들게 만드는 사람들을 ‘육체의 가시’로 보는 해석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경우 우리 식의 ‘눈의 가시’ 또는 ‘인생의 가시’나 ‘사역의 가시’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굳이 ‘육체의 가시’라고 해서 구체적으로 신체적 고통을 적시하는 것 같이 느끼게 만드는 은유의 어색함은 노련한 글쟁이 바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했다는 표현으로 묘사하는 것은 많이 불편한 수사법이다. 사용된 동사 ‘아피스테미’(ἀφίστημι)는 제거의 함의가 강한데 사람에 대해 이런 기도를 세 번씩이나 ‘간청’으로 드렸다는 것은(고후 12:8) 사랑과 복음의 사도로서는 입에 담기에 유치할 정도로 창피한 생경함의 노출이 될 것이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 ‘한 번 기도했다’고 말하면, 대체적으로 40일 정도의 집요한 작정 기도 같은 것이었다. 바울이 미운 사람들의 제거, 또는 그런 인간관계의 해결을 위해 세 번에 걸쳐 장기간 모든 것을 걸고 기도하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 주려 해도 그럴 수 없이 영적으로 흉측한 밉상이다.
그래서 나도 구체적 증언과 같은 확정 증거는 없으나, 바울의 ‘육체 가시’가 강렬한 환상 체험(고후 12:1-7) 후에 인간의 뇌에 부작용처럼 남을 수 있는 상흔 같은 ‘간질’(癎疾, epilepsy)이었을 것으로 감히 추정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했던 자신의 질병 암시 표현 때문이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갈 4:13-14).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 ‘간질’ 현상은 수치스러움을 넘어 사역에 심각한 치명적 장애였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귀신 들린 것으로 보면서 조롱했을 것이다. 바울이 이 육체의 가시를 자신의 ‘약함’ 또는 ‘수치와 능욕’ 등으로 암시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후 12:10).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치명적 논란이 될 수 있는 약점을 바울 몸에 그대로 두셨다. 복음은 바울의 능력과 체면이 아니라 그 약점 가운데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고후 12:9). 바울이 이 고질병을 위해 그렇게 간절히 장기간 기도했으나 최종적으로 거절 당하면서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주신 결론의 말씀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12:9a). 그래서 세 번씩이나 기도했으나 해결 받지 못한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오히려 크게 기뻐하면서 자랑거리로 삼는 역설의 진리를 선언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2:9b).
그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확정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한 평생 짊어지고 사는 치명적 아픔이었던 점은 ‘사탄의 사자’라는 말에 살 깊이 박힌 총알처럼 남아있다. 누구에게나 이런 사탄의 사자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에게, 그 고통을 제거할 수는 없으나 그 고통을 감내하여 승화시킬 수 있는 은혜가 반드시 넘친다. 그래서 내게 ‘사탄의 사자’라고 악담할 만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절감될 때 하나님 나라 인생의 복은 오히려 절정에 이른다. 내 생애 돌아보니, 나도 바울같이 그랬다. 사탄의 사자라고 할만한 것들이 운명처럼 인생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 유승원 목사
